메이지 유신을 규명한다
投稿日 : 2018年05月11日
메이지 유신 150년- 정치와 경제의 관점에서 2개의 기사를 선정했습니다.
정치
가루베 다다시, 미타니 히로시 “좌막과 근왕의 대결적 사관은 이제 그만두자” ≪중앙공론≫ 4월호
가루베 다다시(苅部直) 도쿄대학 교수는 ≪중앙공론≫의 미타니 히로시(三谷博) 아토미학원 여자대학 교수와의 대담에서 150주년을 맞이한 메이지 유신(1868년)에 대해 “일반적으로 유포된 역사의 이미지와 역사학의 상식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미타니 씨도 그 오해의 하나가 막부 말기 마지막 해(1867년)의 국내적인 대항 관계가 “좌막(佐幕 막부를 보좌하는 집단)” 대 “근왕(勤王 왕을 받드는 집단)”의 이항 대립으로 설명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면서 “큰 오해입니다. 실제로는 대정 봉환(에도 막부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반납) 후 왕정복고를 도쿠가와를 중심으로 추진하는 세력과 도쿠가와를 배제하고 추진하려는 세력의 두 세력으로 갈려 경쟁을 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올해는 “메이지 유신 15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데, 가루베 씨는 “오히려 2021년에 폐번치현(廃藩置県 번의 폐지와 현의 설치) 15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이 일본의 근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라고 제언했다. 그 이유로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성과인 신분제의 해체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들었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일종의 혁명’ 후의 반동으로 “큰 소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도 특필할 만하다”고 하면서 구미의 국가들이 메이지 유신을 이해하기 어려운 배경에 대해 “혁명을 일으켜 근대화를 했는데도 군주가 남아 있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가루베 씨는 메이지 유신에만 한정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고 메이지 유신에서부터 150년에 이르는 근대사를 둘러보면서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다음 세대에 남겨야 하는지 논의하는 것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라고 논했다.
경제
모리구치 지아키, 나카바야시 마사키 “쇄국 일본이 알게 된 경쟁과 기술 혁신의 의미” ≪중앙공론≫ 4월호
나카바야시 마사키(中林真幸) 도쿄대학 교수는 ≪중앙공론≫의 모리구치 지아키(森口千晶) 히토쓰바시대학 교수와의 대담에서 근세 이후의 일본경제 발전에 대해 기존의 시각인 “메이지 유신 이후”가 아니라 “에도 시대 후기부터 이미 경제 성장은 시작되었다”라고 하면서 메이지 유신 이후의 큰 변혁을 가져온 것은 “신분 제도의 폐지”라고 강조했다.
모리구치 씨는 18세기 이후의 에도 시대 후기의 일본은 생산성이 상승하는 가운데 인구 상승은 3000만 명으로 더 이상 늘어나지 않게 되자, 결과적으로 생활 수준이 향상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나카무라 씨가 추산한 공물의 실효 세율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에도 막부의 초기는 농업 생산의 약 40%였던 공물이 에도 시대 후기에는 30% 이하로 줄었다고 하면서 최근의 경제 역사 연구에서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이라는 에도 시대의 이미지가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점이 부각되었다고 했다. 일본과는 달리 끊임없이 전쟁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구의 경제사에서는, 전쟁이 근대 국가 형성의 추진력이며 기술 진보의 원동력으로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경쟁을 통한 혁신을 최대화시키는 시스템이었던 서구에 비해 일본은 쇄국 정책과 신분 제도, 분권적 군사 제도인 막번(幕藩) 체제와 같이 경쟁을 최소화하여 안정과 평화를 최우선시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개국의 시점에서 서구 열강과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의 차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모리구치 씨는 서구 국가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에도 후기에 일본이 식민지화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과 프랑스 양국이 중국 대책에 주력했으며 미국도 남북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던 사이의 짧은 시간에 일본이 근대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며 “일종의 기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나카무라 씨는 식민지화를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은 “에도 시대에 이미 미토(水戸) 사학이나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주민들에게 전파시킨 국학이 존재하여 사람들 사이에 국가로서의 통합성과 국가 의식이 싹터 있었다는 점”이 큰 요인이었다고 논했다.
Photo: PPA/AF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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