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다카쿠라 겐과 중국인
post date : 2016.07.12
■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모리 시게아키 ‘오바마 대통령은 히로시마에서 나를 껴안았다’ 문예춘추 7월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5월27일 피폭지·히로시마를 방문한 것은 미일 양국의 “화해”뿐만 아니라 핵폐기 실현을 위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중에서도 연설을 마친 오바마 대통령이 한 피폭자를 껴안은 모습은 전세계에 감동적인 장면으로 전해졌다. (Photo: Reuters/AFLO)
그 피폭자는 히로시마에 거주하는 역사학자·모리 시게아키 씨이다. “원폭 희생자에게 국적은 무관하다”는 모리 씨는 히로시마에서 피폭으로 숨진 미군 포로의 숨겨진 진실을 오랫동안 조사해 온 인물이다. 문예춘추의 독점 수기에 따르면 모리 씨가 피폭으로 숨진 미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74∼75년에 NHK가 실시한 ‘원폭 그림’사업을 통해서이다. 그 중에 미군이 그린 그림이 20여점 있었다. 또한 국내외의 공문서, 도서관의 자료를 찾아 읽은 모리 씨는 “미국은 오랫동안 히로시마 원폭으로 미군이 숨진 것을 공식 기록에서 지웠다. 원자폭탄이라는 무서운 신형무기를 일본인에게만 사용하려 했으나 자국의 군인도 휘말렸다. 당시 미국 정부는 미국 내의 반발 여론이 두려워 사실을 숨긴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피폭으로 숨진 미군은1945년 7월말 주고쿠 지방의 산에 추락한 미B-24폭격기 승무원 등을 포함한 12명이다. 심문을 위해 히로시마로 이송됐는데 추락한 폭격기의 카트라이트 기장은 도쿄로 이송됐기 때문에 피폭을 면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 기장은 농학자가 되었고 모리 씨와 교류를 이어오다 50년 이상 세월이 흐른 1999년에 퇴역군인회 회장, 가족과 함께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그때 모리 씨가 자비로 위령비를 만들고 기장이 위령비문을 썼다.
모리 씨는 오바마 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망설였지만 2015년에 미군 피폭사 이야기를 영화화한 미국 영화감독으로부터 “당신 혼자 참석하는 게 아니다. 피폭한 미군 12명의 영혼이 당신과 함께하니 괜찮다”라는 메일을 받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수기 마지막에 모리 씨는 “오바마 대통령의 포옹은 나뿐만 아니라 국적을 초월한 원폭 피폭자 모두에 대한 포옹이었을 것”이라고 맺고 있다.
・아키바 다다토시 ‘핵 없는 세계 실현을 위한 이정표로’세카이 7월호
아키바 다다토시 전 히로시마 시장은 ‘세카이’의 논문에서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피폭지 히로시마 시와 미국 정부간의 협상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오바마 대통령의 역사적인 히로시마 방문을 평가했다.
아키바 씨는 히로시마 방문의 배경에는 미국 여론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원폭 투하는 옳았다’고 믿는 미국 국민은 1945년에 85∼90%였으나 2009년에는 67%, 2015년에는 50%대까지 내려가 “상당히 급격히 여론이 변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 때문에 ‘히로시마 방문’이 곧 ‘사죄’라는 전제의 반발이 줄어들었다”고 분석했다.
또 아키바 씨는 히로시마 방문의 효과 중의 하나가 “비참한 경험을 한 피폭자와 히로시마 시민이 미국과 미국인을 미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친구로서 환영하는 것”이며 “보복과 미움, 원통함 등을 초월한 화해의 힘이 거기에 있다”고 하고 일미화해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을 강조했다.
아키바 씨는 또한 오바마 대통령 연설에 ‘사죄’가 없었다고 하면서도 “화해를 위한 자세는 표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사죄’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아키바 씨가 생각하는 ‘화해’의 기본적인 개념은 “폭력과 전쟁의 부정, 그리고 미움, 폭력, 보복의 연쇄를 끊는 것. 또한 작더라도 공통점을 찾아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아키바 씨는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에서 ‘히바쿠샤(피폭자)’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에 감사하며 “오바마 대통령의 인간으로서의 진지한 자세, 짧은 시간이었지만 피폭자와 히로시마를 직시해 준 사실에 많은 피폭자들이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라고 강조했다.
■ 다카쿠라 겐과 중국인
·류원빙 ‘다카쿠라 겐과 중국인-일본 영화와 스타를 받아들인 경위’외교 7월호
와세다대학 강사 류원빙 씨는 외교 7월호에서 전후 일본 영화 스타들이 일중간의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중국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중국인의 일본에 대한 인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 경위에 대해 분석했다. 이 중 중국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인기와 지지를 얻은 사람은 다카쿠라 겐이다. 류원빙 씨는 “그의 남자다운 연기를 계기로 ‘진정한 남자다움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각 매스컴에서 다루고 ‘남자다운 남자를 찾는다’는 문구가 1980년대 초반의 유행어가 됐다”고 했다.
특히, 류원빙 씨는 다카쿠라 겐이 당시 중국 여성의 결혼 이상형이었을 뿐만 아니라 1983년에 처음 실시된 중국 국내외 영화 스타 인기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것에 대해 “일본인의 이미지가 잔학한 군인에서 인간적인 존재로 변모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그의 영향력이 지대함을 강조했다.
한편, 일본 영화와 일본인 스타를 받아들이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혐오와 동경, 역겨움과 친밀함이 뒤섞인 상반된 이중 구조야말로 중국에 있어서의 일본 문화 수용의 특징”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류원빙 씨는 열광적인 일본 영화 열풍이 사라진 후 2000∼16년까지 17년 동안 중국에서 개봉된 일본 영화가 20편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지금 일중 양국에 있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안일한 인식에 기댈 것이 아니라 상대국과 진지하게 마주하고 서로 이해하는 새로운 이문화 수용의 모델을 구축·확립시키는 것이다”라고 제언했다.
*이 페이지는 공익재단법인 포린 ・프레스센터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정부 및 기타 단체의 견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